국립오페라단 화전가 - 2
- classiccriticism
- 2025년 12월 31일
- 3분 분량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피어난 노래
2025년 10월 26일 일요일 15:00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화전가>는 한국전쟁 직전 안동을 배경으로, 남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화전놀이를 준비하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 개개인의 삶 속에 깊이 드리워진 과거의 상처와 다가올 전쟁의 비극을 병치하였다. 희곡을 바탕으로 연극으로 먼저 선보인 <화전가>는 이번 국립오페라단을 통해 오페라 무대에 처음 선보임에 따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학적인 부분과 보완해야할 과제가 공존했다.
오페라 <화전가>는 별도의 서곡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막이 오르기 전, 자막 화면을 활용한 프롤로그로 극의 배경을 설명한다. 이때 풀벌레 소리가 섞인 배경음은 작품의 시공간을 직관적으로 제시하며 극의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도입부의 감각은 무대 전체로 이어졌다. 천장에서 길게 늘어진 반투명한 막을 비롯해 대청마루, 마을 정자 등 한국적인 공간과 사물의 미감을 활용한 무대 디자인은 극 전반에 걸쳐 시각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작품 속에서 '꽃'은 이중적인 장치로 활용됐다. 봄의 풍경은 표면적으로 아름다움과 화전놀이의 소소한 행복을 조망하지만, “너는 오지 않는데 꽃은 다시 피었네”와 같은 가사를 통해 상실과 그 아픔을 은유하기도 했다. 이러한 장치는 연출적으로도 남편과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교차시켰으며, 관객이 감정의 전환점을 쉽게 알아차리게 했다. 가령 1막 중반부에서 김씨와 장림댁, 여성 합창단원들은 아들과 남편의 부재에 따른 상실감을 노래하다가 영춘화나 살구꽃과 같이 꽃 이름을 외치며 순간적으로 꽃을 조망했다. 이때 조명은 밝아지고 무대장치 좌우 벽면의 색상이 변화했으며, 동시에 남성 합창단이 등장하여 현실과 상실이 교차하는 환상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지었다.
한편, 연출은 때때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하여 관객의 해석을 다층적으로 유도하였다. 4막 화전놀이 장면에서는 합창단이 무대 뒤쪽에서 노래하고 무용수들이 중앙에서 춤을 추는 가운데, 주역 가수들은 꽃가루가 날리는 화려한 배경 속에서 무대를 자유롭게 횡단했다. 이로 인해 관객은 인물의 공간적 위치와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연출은 현실과 상실, 환상이 뒤엉킨 복합적인 감정을 화전놀이 장면에 투영하여, 작품의 중심 주제를 다각도에서 성찰하게 했다.
작품의 2막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그 이면에 도사린 비극이라는 양면성을 음악적 색채로 드러냈다. 박실이가 초콜릿을 나누며 흥겨운 멜로디로 분위기를 전환하고, 설탕을 소재로 '달콤한 생‘을 노래하는 대목은 삶에 대한 본질적인 애착과 희망을 투영했다. 반면 커피에서는 바흐의 '커피 칸타타' 선율을 차용하면서도, 이와 대비되는 위기감 서린 극적인 선율을 배치했다. 이는 행복과 비극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음악적 장치로 활용됐다. 또한 외부에서 문을 두드리는 음향 효과와 어우러진 불길한 오케스트라 선율은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반면 이샌댁이 보낸 술독은 먹고 마시며 취하는 즐거운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극적 대비는 2막이 일상의 희로애락을 넘어, 머지않아 닥칠 역사적 비극의 전조와 긴장감을 동시에 전달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화전가>는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와 ‘울고 넘는 박달재’ 등 익숙한 곡들을 차용하여 친숙함을 더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외국어 가사가 주를 이루는 오페라의 관습을 깨고 한국어를 채택했다는 점, 더 나아가 지역 사투리 특유의 억양과 질감을 오페라 장르 속에 과감히 녹여내며 색다른 파격을 선보였다는 데 있다.
한국어를 차용한 측면에서는 대체로 성공적인 시도였다. 1막 정자나무 아래서 홍다리댁과 박실이가 나누는 대화 중 “태어나기 전에도”, “자라나던 날에도” 가사처럼 한국어 고유의 음보율과 반복 운율을 적용해 레치타티보의 말맛을 살려낸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주요 아리아 역시 선율 중심의 명료한 멜로디를 구사하여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소프라노 김수정이 부른 4막 영주댁의 아리아는 임신한 몸으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감정을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다만,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 성악 발성으로 인해 예사소리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안동 지역 사투리는 주로 레치타티보를 중심으로 활용되었으며, 상황에 따른 위트 있는 표현으로 극적 재미를 배가시켰다. 하지만 경상도 특유의 억양과 리듬이 성악 발성과 상충하면서 그 독특한 음률이 완벽히 구현되지는 못했다. 성악가들은 사투리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일반 대사와 레치타티보를 넘나드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벨칸토 발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리듬과 발음상의 이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러한 한계 때문인지 1막 중반부 남성 합창단의 솔로 대목에서는 대본과 달리 "누나야, 동생아, 잘들 있었니?"와 같이 표준어를 사용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이 작품의 1막 초반 봉아 역을 맡은 소프라노 윤상아가 선보인 영어 레치타티보는 완성도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윤상아는 음절 끝에 소리의 밀도를 높여 공간감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정작 음절이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소리를 지탱하는 힘이 부족해 대사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단절되는 인상을 남겼다.
오케스트라는 순간적으로 극의 배경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훌륭한 기량을 보여줬다. 특히 3막에서 봉아가 김씨에게 브로치를 달아주는 장면에서는 플루트 선율에 타악기의 반짝이는 음색이 더해지며 분위기를 환하게 밝혔고, 이어지는 합창단의 코러스가 그 감성을 한층 깊이 있게 전달해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가 무대와의 음량 밸런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가령 1막에서 박실이 역의 소프라노 이미영의 아리아는 선율을 강조하기보다 불협화음 위주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맞물리는 구조였는데, 이 과정에서 둘 사이의 조화가 매끄럽지 못했다. 특히 프레이즈의 끝자락에 크레센도로 음량을 높여가는 과정에서 성악가의 목소리가 가려져 가사 전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독골할매의 “어애할로?” 대목에서도 오보에 연주의 음량 밸런스를 맞추지 못해 동일한 문제가 반복됐다.
<화전가>는 작품의 상징적인 '꽃'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한국적인 미감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해낸 작품이었다. 또한 작곡을 통해서도 개인의 삶에 깃든 소소한 행복과 깊은 상처라는 이중적 주제를 음악적으로 깊이 있게 풀어냈다. 다만 지역 사투리가 서양 음악 기반의 오페라에 완벽히 융화되지 못한 점은 과제로 남았다. 한국어의 음운적 특성과 성악 발성, 특히 사투리의 억양과 운율이 음악적 표현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세심한 연구와 연출적 보완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점들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간다면, <화전가>는 한국 창작 오페라의 독창성을 한층 높이는 의미 있는 수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글 이강원(클래식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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