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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 베르나르 베르베르 x 세종솔로이스츠 〈키메라의 시대〉

  • classiccriticism
  • 2일 전
  • 4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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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란 무엇인가? 데리다적 음악 읽기

-2025.08.27.(수) 19:3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난 8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종솔로이스츠의 제8회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일환으로 ‘키메라의 시대(The Time of Chimeras)’가 연주되었다. 이 공연은 ‘낭독과 연주의 결합’이라는 이색 형식의 곡을 선보임으로써 다양한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프로그램 북에 의하면 강경원 세종솔로이스츠 총감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키메라의 땅’을 ‘무대화’하기 위해 그를 만나 ‘낭독과 음악이 교차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허락을 받아냄은 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 본인이 직접 낭독을 하겠다는 뜻밖의 결과까지 얻어내고 매우 기뻤다고 한다. 그리고 작곡가 김택수(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 작곡과 교수)에게 의뢰하여 이날 세계 초연을 하게 된다.


‘키메라의 땅’은 핵무기를 사용한 3차세계대전이 벌어져 전인류가 멸종 일보 직전에 처했을 때,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를 조합해 새로운 인종을 창조하여 인류의 존속을 꾀한다는 내용의 문명비판적 대중소설이다. 세종솔로이스츠는 바로 이 서사를 음악적 차원으로 변환하여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전반에 김택수의 ‘키메라 모음곡(Chimeric Suite)’, 후반에는 2차세계대전의 폐해를 보고 절규하는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을 배치함으로써 점점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 인류에게 준엄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날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내용적 연결고리 외에 또 형식상의 연결 장치가 하나 숨어 있다. ‘낭독과 음악’이라는 꽤 독특한 음악형식 또한 슈트라우스의 1897년 작곡 ‘에노흐 아르덴 - 낭독과 피아노를 위한 멜로드라마(Enoch Arden - Melodrama for narrator and piano) Op.38’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키메라 모음곡’의 김택수는 소설 ‘키메라의 땅’의 등장인물들과 줄거리를 토대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프로그램 노트 서두에 밝히고 있다.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고 있는 ‘표제음악’이라는 용어가 번득 뇌리를 스친다. ‘1. 서주(Prelude)’부터 ‘8. 울림들(Echoes)’까지 총8곡으로 이루어진 ‘키메라 모음곡’은 소설의 내용을 라이트모티프(leitmotif) 등을 활용하며 묘사하고 있다.

‘키메라 모음곡’은 각 곡이 시작되기 전에 소설의 줄거리가 1~2분간 낭독되고, 이어서 연주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총 여덟 차례의 휴지를 거치며 진행되었다. 관객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불어 낭독과 무대 위 번역 자막을 통해 곧 이어질 음악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연주는 때때로 낭독의 스토리 전개와는 다른 뉘앙스로 흘러갔다. 분명 ‘표제음악’을 표방했음에도 음악은 서사의 궤적과 완전히 합치하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에노흐 아르덴’에서 피아노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하여 존재한다. 이야기의 굴곡에 따라 음악도 변하며 감동적이고 효율적인 스토리 전달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을 함께 프로그램으로 구성하면서 이런 유사함까지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김택수는 음악 형식까지 100년 전의 문법을 따르지는 않은 것 같다.


‘표제음악’을 언급했으니 이제 그 짝을 이루는 ‘절대음악’도 함께 짚어야 글의 맥락이 이어진다. 에두아르트 한슬릭(Eduard Hanslick)은 1854년 ‘음악 미학에 관하여(Vom Musikalisch-Schönen)’를 통해 음악은 특정한 감정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자체의 아름다움과 구조로 감상의 대상이 된다는 절대음악론을 주장하면서 기존의 ‘표제음악’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표제음악’과 ‘절대음악’의 관계는 후대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Deconstruction)와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데리다에 따르면, ‘현전(주류적 흐름)’은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 이면에는 늘 그와 대립하거나 상응하는 다른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따라서 현전은 해체될 수 있으며, 현전이 해체된 자리에는 고정된 대안이 아니라 ‘차이와 연기[차연]’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되는 의미의 흐름이 남는다. 곧, 의미는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끄러지고 유동하는 상태로 남는다.한슬릭은 당시 주류였던 ‘표제음악’이라는 현전을 비판하며 해체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해체의 운동 속에서, 데리다적 차연으로 설명하자면,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절대음악이 도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음악은 소설처럼 구체적 주제를 적시하지 않는다. 한슬릭이 말했듯, 음악은 특정 감정을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음 자체의 구조와 논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예술이다.

김택수의 ‘키메라 조곡’은 원작 소설의 서사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음악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음 자체의 형식적 전개를 중심에 놓는다. 이로써 음악은 음악만의 자율적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동시에 그는 ‘순수한 음의 형식’이라는 또 하나의 현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의 흔적을 환기시키며, 차연의 운동 속에서 해석을 유예하고, 청중에게 다양한 의미 부여의 열린 공간을 내어준다.


‘키메라 조곡’에서 낭독은 거대 주제를 던지는 담론으로 기능하고, 음악은 그 주제를 차연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장으로 작용한다. 낭독과 음악은 각기 역할을 분담하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흔들어 열어두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오늘 초연된 ‘키메라 조곡’은 세종솔로이스츠와 내레이터 베르나르 베르베르, 플루트 최나경, 기타 드니 성호가 함께 연주하였다.

‘1. 서주(Prelude)’는 기타의 아르페지오로 문을 열고, 이어 현악기의 하강 선율이 두 차례 흐른 뒤 내레이션이 덧붙여졌다. 이 선율은 작품 전체의 전개를 지탱하는 주요 모티브로 작용한다.

김택수는 각 악기에 종족별 라이트모티프를 부여하며, 음들의 움직임 속에서 해석의 공간을 펼쳐 나간다. 동시에 곡명에는 여전히 원작의 흔적을 남겨 두어, 청중들이 이를 해석의 단서로 삼게 한다. 그러나 음악은 단일한 의미에 갇히지 않고, 차연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열려 있는 해석의 장을 만들어낸다.


‘2. 창조(creation)’는 전곡을 관통하는 모티브를 다시 제시하며 시작한다. 곧이어 에어리얼(플루트), 노틱(기타), 디거(첼로와 베이스) 각 종족의 모티프가 차례로 등장했다. 에어리얼 모티프에서 플루트는 맑은 음색과 정확한 인토네이션으로 긴 호흡의 선율을 펼쳐 냈고, 현악기의 정제된 화음은 그 선율을 단단히 떠받쳤다. 그러나 노틱 모티프에서 기타의 어택이 다소 불안정하게 들려 신비로운 색채의 흐름을 완전히 살려내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디거 모티프에서는 첼로와 베이스가 묵직한 저음을 바탕으로 땅을 파고드는 듯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작품 전편을 관통하는 복선 같은 어두운 질감을 부여했다.‘3. 디거들(Diggers)’은 곡명과 낭독의 내용이 직접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이 곡부터 각 종족의 이름이 곡명을 이루는데(‘노틱들’, ‘에어리얼들’, ‘악셀’), 곡명만 보면 특정 종족을 묘사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낭독은 새로운 종족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연주에서는 저음부 현악기의 반복 리듬이 중심을 이루며, 점차 중·고역과 교차하면서 긴장을 고조시켰다.‘5. 에어리얼들(Aerials)’에서는 다이내믹의 변화가 극적으로 표현되며 서사의 긴장을 한층 높였으며, 이어지는 ‘6. 갈등들(Conflicts)’에서는 바이올린 솔로가 돋보였다. 긴 호흡의 선율이 서정성과 긴장을 동시에 머금으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특히 포르티시모로 치닫는 부분에서의 절묘한 보잉은 곡의 감정적 중심을 형성했다. 마지막 ‘8. 울림들(Echoes)’에서는 기타와 바이올린 듀오가 청중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기타의 아르페지오는 아름다웠으나 음량이 다소 크게 들려 바이올린의 세밀한 뉘앙스를 부분적으로 가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두 악기의 대화는 작품 전체의 에필로그처럼 긴 여운을 남겼다.

후반에는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이 연주되었다. 세종솔로이스츠의 장점이 선연히 드러난 연주였다. 첫 음은 여린 p로 시작해 섬세하게 울려 퍼졌고, 이어진 스포르찬도의 명징한 대비는 충격적 상황을 직면한 뒤 억눌린 심연에서 터져 나온 내면의 절규처럼 다가왔다. 이 대비가 초반부터 긴장을 고조시키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호소력 짙은 바이올린의 음색은 작품 전편의 정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중간에 더블베이스가 전면으로 부각하면서 저역이 두드러진 부분이 두어 차례 있었는데, 이때 중·고역의 투명성이 잠시 가려져 전체 음향이 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에서는 전반적인 균형을 되찾으며, 겹겹이 쌓인 화성의 장대한 파도를 연상시켰다.

피날레에 이르러 베이스는 한층 정제된 울림으로 변모하며, 곡의 마지막을 받쳐내는 기둥처럼 작용했다. 어둡지만 깊이 있는 그 울림은 슈트라우스가 전쟁의 폐허 위에 남긴 비탄과, 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생명력의 흔적을 설득력 있게 전해주었다.


이번 공연에서 김택수의 ‘키메라 조곡’은 원작 소설의 서사를 음으로 환치하면서도, 음악의 자율적 흐름 속에서 열린 해석의 공간을 제시하였다. 내레이터의 낭독은 거대 주제를 던지는 담론으로 기능했고, 음악은 이를 차연 속에서 흔들며 다시 생성함으로써, 닫히지 않는 의미의 장을 제시했다.


이어 연주된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은 전쟁과 폐허를 마주한 비탄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회복의 가능성을 함께 들려주었다.두 작품은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는 미래를 향한 경고로, 다른 하나는 과거의 상흔에 대한 애도로, 끝내 닫히지 않는 해석의 지평을 드러냈다.

이번 공연은 보기 드문 ‘낭독과 연주의 결합’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답을 요구한다기보다, 질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울림은 현대 세계 음악사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 하나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글/클래식음악평론가 신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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