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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 ‘낭만주의 거장'

  • 작성자 사진: 한국클래식음악평론가협회
    한국클래식음악평론가협회
  • 5월 1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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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샘플러보다 정식 코스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

– 2025년 4월 19일 롯데콘서트홀 '낭만주의 거장' 연주회 비평


클래식 음악계는 오랜 시간 동안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해 왔다. 특히 최근에는 사랑받는 레퍼토리 중심의 기획공연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번 롯데콘서트홀에서 지난 4월 19일,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와 네명의 협연자가 연주한 "낭만주의 거장" 기획전 역시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쇼팽, 슈만, 라흐마니노프라는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가장 유명한 협주곡만을 하루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연주하는 형식은, 다양한 곡을 한 번에 경험하고자 하는 관객의 니즈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진정으로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이유는, 단순한 친숙함을 넘어서는 깊은 사유와 치열한 해석, 그리고 고도로 정제된 연주에 있다. 이번 공연은 그러한 본질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만드는 무대였다.


  1. 오후 공연: 명곡의 아우라와 놓쳐버린 긴장감


(1)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

1878년에 작곡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초연 당시에는 지나치게 난해하고 기교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유의 선율미와 정열적인 정서로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번 연주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양정윤은 거침없고 강렬한 보잉을 통해 차이코프스키가 작품에 담아낸 '열정의 서사'를 직관적으로 전달했다. 특히 카덴차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에너지로 청중을 압도했으며, 음향의 질량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해석은 설득력 있었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간의 조율이 다소 느슨해졌고, 현악부의 스타카토처리가 흐릿해지면서 긴장감이 희석된 점은 뚜렷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2)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 작품 23

1874년 작곡된 이 협주곡은 러시아 낭만주의 정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장대한 스케일, 민속적 요소, 강렬한 감정의 분출이 혼재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다.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대담한 터치와 과감한 다이내믹 전개를 통해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충실히 구현했다. 그러나 루바토를 활용한 자연스러운 프레이징에는 다소 미흡함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곡의 드라마틱한 구성을 밀어붙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서정적 층위나 세밀한 감정의 결은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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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쇼팽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단조, 작품 11

쇼팽이 20대 초반에 작곡한 이 협주곡은, 기교적 화려함보다는 내면의 섬세한 감성과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피아노가 주인공이 되어 오케스트라와 부드럽게 대화하는 구조는, 대규모 오케스트레이션보다 세심한 표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번 연주의 협연은 앞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협연했던 라쉬코프스키가 연주했는데 동일한 협연자인 사유인지 앞의 차이코프스키 협연과 해석적 차별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1악장 Allegro maestoso에서는 쇼팽 특유의 비장미와 서정적 고독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고, 오케스트라는 금관 파트의 불안정한 인톤네이션으로 인해 전체적 긴장감을 잃었다. 또한 롯데콘서트홀 특유의 풍성한 울림이 피아노 음색의 디테일을 덮어버리면서, 아티큘레이션과 음색 변주의 미묘함을 살리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더했다. 공연장에 특성을 고려하여 서스테인 페달을 적정이 조절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연주였다.


  1. 저녁 공연: 안정된 기량, 그러나 심장의 박동은 미약했다


(1)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작품 54

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이 협주곡은, 기존 협주곡들과 달리 화려한 기교 과시보다 내면적 대화를 중시한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서사를 이끄는 이 작품은 '낭만적 주관성'의 정수를 보여준다.

협연을 맡은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일관된 안정감을 바탕으로 슈만 특유의 서정적 흐름을 구현했다. 특히 관악부와 피아노가 조심스럽게 감정을 주고받는 순간에는 섬세한 균형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곡 전반에 걸쳐 감정선의 기복이 크지 않아, 긴장과 이완의 역동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슈만 협주곡이 가진 심리적 깊이와 투명한 긴장감은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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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 작품 18

라흐마니노프가 심각한 우울증과 창작 위기를 극복한 후 탄생시킨 이 협주곡은, 내면의 상처와 승리의 서사가 응축된 걸작이다. 심금을 울리는 선율과 드라마틱한 전개, 무한한 서정성은 이 곡을 영원한 사랑을 받는 협주곡으로 만들었다.

협연을 맡은 피아니스트 손정범은 깊고 진중한 인트로덕션으로 곡을 시작했다. 처음은 다소 빠르게 흐름을 힘있게 진행하다가도, 1악장 후반에는 깊은 감정을 담아 안정적으로 연주했으며, 오케스트라 역시 이러한 협연과 호흡을 맞춰 나갔다. 그러나 2악장 Adagio sostenuto부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간의 미세한 간극이 발생했다. 반복된 미스터치들은 연주의 몰입을 방해했고, 3악장에서는 결국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모두가 앙상블을 잃으며 흐름이 무너지는 눈에 띠는 미스가 나타났다. 비록 재정비 후 연주를 이어갔지만, 이미 구축된 긴장감은 회복되지 못해 매우 아쉬운 마무리가 되었다.


(3)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 작품 30

'악마의 협주곡'이라 불릴 만큼 난해한 이 작품은, 엄청난 기술적 요구와 동시에 깊은 감정의 울림을 필요로 한다.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러시아적 서정성과 강렬한 드라마를 함께 담고 있는 걸작이다.

협연을 맡은 라쉬코프스키는 빠른 템포로 이 곡을 견인하며 고난도의 카덴차를 무난히 소화했다. 안정적인 테크닉과 정확한 리듬 감각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2악장 intermezzo-Adagio에서 섬세한 다이내믹 조절이 부족해, 곡의 감정 곡선이 평면적으로 들렸다. 특히 3악장에서 주제가 재현될 때 극적인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곡 전체의 서사적 흐름을 극대화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남겼다.


하루 동안의 6곡의 연주 그리고 3명의 협연자가 보여준 성과와 과제

이번 "낭만주의 거장" 기획전은 익숙하고 사랑받는 대곡들을 통해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내밀한 세계를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하루 동안 여섯 개의 대형 협주곡을 소화하는 무리한 프로그램, 그리고 일부 협연자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부담은 연주의 섬세함과 긴밀성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클래식 음악은 단순한 인기곡 나열로 완성되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이 지닌 사유의 깊이, 감정의 섬세함, 그리고 연주자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그려내는 예술적 서사가 있을 때 비로소 관객의 심장을 울릴 수 있다. 이번 공연은 클래식 음악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조용히 상기시키는 무대였다. 수백 년을 이어온 명곡들은 단순히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베스트 샘플러가 아닌 진정한 코스를 준비하는 연주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다.


글 조영환(클래식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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