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익은 대가의 베토벤 피아니즘
- 한국클래식음악평론가협회

- 2021년 11월 10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1월 24일
루돌프 부흐빈더의 베토벤 소나타
평론가 이호순

한 평론가는 그의 연주를 듣고 “피아노가 펑펑 울고 난 뒤에 소리를 내면 이런 소리가 나올
것이다. 차분하고 개운한 아름다운 음색”이라며 극찬했다. 사실 저 말은 내가 루돌프 부흐빈
더(Rudolf Buchbinder, 1946~ )의 연주를 듣고 예술의 전당을 나오면서 나왔던 감탄이다.
그는 60년 경력의 대부분을 베토벤 해석에 바친 베토벤 스페셜리스트이다. 네 개의 베토벤 피
아노 소나타로 구성된 이번 프로그램이 그의 생애에 걸쳐 해석해낸 피아니즘을 여실히 보여준
다.
그는 인터뷰에서 “베토벤이 우리 피아니스트들에 대해 경악할 만큼이나 속속들이 알고 있었
음에 놀라게 된다”며 베토벤에 대한 강한 신뢰를 드러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이 연주자
보다는 작품 자체를 드러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부흐빈더는 유독 베토벤을 드러내는 연
주를 펼쳤다. 루바토(Rubato)는 자제했고 피아노의 음색으로 해석을 가미했다. 부흐빈더는 연
주할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콘서트 동안에는 베토벤
이 피아니스트를 초대하여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베토벤의 우주에서 천구의 방향과 바람,
별자리 등을 경험하여 음악적 항해를 할 수 있어야”한다고 답했다.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하
는 경향보다는 베토벤을 체화하고 재현하는 것에 몰두한 것이다.
피아노 음색은 그의 연주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건반을 필요 이상 깊게 누르지 않으
면서도 완전히 타건하는 그의 주법은 밝은 음색과 섬세한 연주가 가능한 이유다. 피아노를 배
울 때 들었던 질문, ‘손이 허공(虛空)에 떠 있는 것처럼 힘이 빠져있는가’. 중력에 지배를 받는
지구에서 허공처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는 중력을 거스른 듯 태연하게 건반을
터치한다. 그의 연주의 셈여림은 패기 넘치는 젊은 연주자들과 비교하면 작은 편이다. 그것이
음색을 부각시키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몸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그의 연주가
폭넓은 감정을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 부흐빈더 연주의 단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주자
의 개성을 드러내는 연주가 아닌 베토벤의 작품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연
주해석으로 보여진다.
부흐빈더는 세 번째 곡 <피아노 소나타 10번 G장조, Op. 14, No.2>를 마치면서 낮은 근음
을 스타카토로 장난스럽게 마무리했다. 경직되었던 청중들은 웃으면서 긴장을 풀었다. 긴장하
는 쪽은 오히려 콘서트홀을 가득채운 관객이었다. 경직된 관객의 상태를 파악하고 긴장을 풀
어주려는 그의 여유로운 무대 매너는 그의 오래된 연주경력을 보여주었다.
연주자가 고령이 되면 자신의 예술성이 중요해지고 연주의 정확도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악보의 음표를 놓치지 않고 성실하게 연주해 나가 그의 베토벤 피
아니즘을 완성했다. 불같은 삶을 살았던 베토벤을 단편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친
작품해석과 자연스럽게 떨구어내는 담담한 터치로 자신만의 베토벤을 그려냈다. 좋은 연주는
힘을 빼는 것이라고 한다. 아직 인생의 연륜이 부족해인지,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인지
연주자에게 숙제와 같은 그것을 부흐빈더는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이
남발되는 상황에서 마케팅으로 점철된 이름표는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가 이번 무대에서
보여준 농익은 피아니즘은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연주자 명단 한 켠에 자리하기에 부족함이 없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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